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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5. 15世 〉1. <요재공>둔암공휘홍국유사(遯菴公諱弘國遺事)
1. 문헌 목록 〉15. 15世 〉3. <부정공>고강공휘동운묘갈명(皷岡公諱東耘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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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정공>노남공휘광운유당지명(蘆南公諱光耘幽堂誌銘)
蘆南公諱光耘幽堂誌銘 公幽居在蘆洞南麓即公父祖曾三世壽葬道理峰之案山也嗚呼當此天飜地覆埴海爲陸鑿山通道之時雲嶺路線犯逼幽堂腦脉固持而終不能禁者勢也欲遷而亦不敢啓者機也於是父兄咸曰吾輩不肖莫大遭此罔極之變則竊恐後來安知不爲陵谷移遷之變乎然則誌此幽堂埋于塋南而載於家牒使來裔百世明明記存是亦一道也命渠以撰誌渠亦是懼不敢以不文而違命且昔我王考以最長房奉祀三十餘年渠爲躬叅助奠焉今公距世雖至親盡尚切感慕曷不悦服於玆役乎公諱光耘字汝盛玉川趙氏高麗侍中諱璋爲上祖玉川府院君忠獻公諱元吉虔谷先生諱瑜縣監諱智崑泰仁縣監諱大承訓鍊奉事諱珏盖四世以上也曾祖通德郎諱義吉祖諱時耈考諱維春妣清州韓氏通政勉吾女利川徐氏命履女公韓氏出也生于 肅廟癸酉十一月十一日沈靜之姿知幾而誠於哲人之思堅確之操勵行而守於志士之爲正衣冠尊瞻視愼語黙戒聲色修身之要也事親和顔色居室敬相待愛弟同溫飽敎子姪有禮御奴僕有恩齊家之正也長幼服其敬愛朋友尚其信義族戚感其睦姻鄉人頌其慈善接人之和也志氣慷慨臨事坦蕩見人有于譽納媚者則規以義理使恥格焉甞曰士當先義而後利正己而格物不可枉己而徇人利己而害物也人之百行源於孝則豈有不孝於親而行於身者乎一日慈候欠寧憂形于色暫不離側稽顙于辰願以身代輒應有效至復膳與弟欣慶矣乃有加於小愈遂至大變而屬纊叩呌靡逮戚易兼至追孝於繼母亦愛異母二弟愉湛既治庭無間言人有稱焉公恒切不遇之嘆且切無嗣之憂曰不孝莫大於無後者以其絶宗嗣也余自祖宗來血氣相禪而身爲監察公泰仁公宗脉而至此無傳罪何可贖每於夫人窮天痛嘆弟皷岡公怡怡奉慰曰弟之子即兄之子渠以長子當入承宗嗣奉先祀誠志養也何其心憂切切乎於是公稍可解憂矣親年抵甲歲享康日祝無疆天慶是歲季冬偶患不安節竭誠禱藥百方調治明年辛丑正月八日遭艱哭必頓絶其於送終之節居憂之制盡誠盡禮孝親之始終可謂全矣自後除先廟之享後母之養二事外家政一委於卯君斷念世况潔身林泉以終年於戊辰四月二十二日壽五十六配濟州高氏慶華女有婦德忌四月十九日無育墓同封子以弟東耘長男重命孫二男二女廷良廷仁光山金璲全州李뤲妻曾孫奎祥璘祥灝祥廷良三男德祥河祥玉祥陽川許芢妻洪州宋廷琦妻廷仁三男二女餘不盡錄噫公之弘毅溫良若使致位於現達則可能正國範俗而厄窮草萊以沒世自古士之不遇亦命也歟是可嘆也嗚呼盖後孫之氣血乃先祖之精靈所毓也其軆魄所在之塋後孫安得不謹守謹保乎伊今六七世爲世路變遷犯道路之戒故將爲來世懼而開壙南納誌銘銘曰 吾家世阡蘆山之陽枕乙一壙是祖攸藏志行篤敬闇然斐章千億來裔永守不忘 六世孫 炳寬 謹撰 노남공휘광운유당지명(蘆南公諱光耘幽堂誌銘) 공이 묻힌 곳은 노동 남쪽 기슭이었는데 그곳은 공의 부조증(父祖曾) 三세를 수장(壽葬)한 도리봉의 안산이었다. 아! 천지가 번복이 심한 때를 당하여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들고 산을 헐어 길을 내는 때에 운월재 노선이 유당의 뇌맥을 범핍하여도 강압당하고 마침내 금하지 못함은 형세요, 옮기고자 하고 또한 감히 열지 못함은 기틀이었다. 이에 부형이 말하되 『우리 무리가 불초 막대하여 이와 같이 망극한 변을 만났은즉 또 뒤에 어찌 상해의 변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그런즉 유당지를 돌에 새겨 묘소 남쪽에 묻고 보첩에 기록하여 후예들로 하여금 영원히 밝게 기록하여 가지게 한 것이 도리이다.』라고 하고 나에게 명을 지으라 명하거늘 내가 또한 이를 두려워하며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옛적에 나의 왕고(王考)가 종손(宗孫)으로 三十여 년 봉사하였으므로 내가 몸소 참사하였으니 비록 복진한 자손이라도 오히려 간절히 감모할 것인데 어찌 이 일에 기꺼이 따르지 않겠는가. 공의 휘는 광운(光耘)이요, 자는 여성(汝盛)이며 옥천조씨인데 건곡선생 휘 유(瑜)의 후손으로, 고의 휘는 유춘(維春)이요, 비는 청주한씨 통정(通政) 면오(勉吾)의 딸과 이천서씨 명리(命履)의 딸인데 공은 한씨 출이다. 숙종 계유년(一六九二) 十一월 十一일에 태어난 공은 긴밀한 바탕이 기미를 알아 어진 사람 생각이 성실하고 굳은 절조를 힘써 행하여 뜻있는 선비의 소행을 지키며 의관을 바로하고 자세를 바로하며 언어를 삼가고 성색을 경계한 것은 몸을 닦는 요체요, 어버이를 섬기며 낯빛을 화하게 하고, 내외가 서로 경대하며 형제간에 따뜻하고 배부름 함께 하고 자질을 법도 있게 가르치며 노복을 은혜로 거느린 것은 제가의 도리이며, 어른과 어린이는 공경과 사랑에 감복하고 친구간에 신의를 숭상하며, 족척은 화목과 화동에 감사하고 고을 사람이 자선을 칭송한 것은 사람을 접대한 화기였다. 지기가 강개하여 매사에 탄평하고 사람이 명예를 탐하여 아첨한 자를 보면 의리로 깨우쳐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게 하였다. 일찌기 말하되 『사람의 일백 행실의 근원이 효도에 있은즉 어찌 어버이에게 효도를 않고, 스스로 행할 자가 있을까보냐.』 하였다. 하루는 어머님 기후가 평안하지 못하므로 근심한 빛을 가지고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며 새벽까지 이마를 조아리고 몸으로 대신하기를 원하니 예에 지나치게 슬퍼하였다. 따라서 계모에게 효도하고 또 배다른 두 아우를 사랑하여 화람 차담하니 가정에 사잇말이 없었다. 공이 항상 때를 만나지 못함을 한탄하고 또 후사가 없는 근심이 간절하여 불효가 후사없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는 것은 종사가 끊기기 때문이다. 내가 조종(祖宗)으로부터 내려온 피와 기운을 이어 받았고 몸이 감찰공, 태인공의 종맥이 되어 나에게 와서 후사가 없으니 이 죄를 어찌 면할 것인가. 매양 부인과 더불어 하늘에 사무치도록 슬피 탄식하니 아우 고강공(皷岡公)이 화이하게 위로하여 가로되 『아우의 아들이 곧 형의 아들이니 나의 큰 아들로써 마땅히 종사로 입승하여 선영의 향화를 받들게 한 것이 진실로 뜻을 기린 것이니 어찌 근심하는 마음이 애절하십니까?』하니 이로부터 공이 근심을 덜었다. 어버이의 춘추가 환갑이 되어 날로 무강의 수를 빌었더니 이 해 겨울에 우연히 병을 얻어 백약이 무효하여 다음해 신축년 정월 八일에 세상을 떠나니 곡읍 돈절하고 송종(送終)의 절차와 거상의 예제에 정성을 다하니 어버이께 효도한 시종이 전일하였다 하겠도다. 이 뒤로부터 선영 봉사와 계묘 봉양 외에 집안 일은 단념하고 임천에 몸을 조촐히 하다가 무진년 四월 二十二일에 향년 五十六세로 별세하였다. 배는 제주고씨(濟州高氏) 경화(慶華)의 딸로 부덕이 있었으며, 기일은 四월 十九일이요, 자손은 없었으며, 묘소는 동봉이었다. 아우 동운(東耘)의 장남 중명(重命)을 후사로 삼아 손자 二남 二녀를 두었는데, 정량(廷良), 정인(廷仁), 광산(光山) 김수(金璲), 전주(全州) 이운(李뤲)의 처요, 증손 규상(奎祥), 인상(璘祥), 호상(灝祥)은 정량의 소생이요, 덕상(德祥), 하상(河祥), 옥상(玉祥), 양천(陽川) 허인(許芢), 홍주(洪州) 송정기(宋廷琦) 처는 정인의 출이며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크고 굳세며 따습고 어진 자질로 만일 자리에 나아가 현달하였으면 능히 나라를 바로잡고 풍속을 규범할 것인데 초야에 묻혀 세상을 버리었으니, 예로부터 선비가 때를 못 만난 것도 운명인가, 가히 탄식할 바로다. 아! 대개 후손의 기운과 피가 선조의 정령이 기른 바라 체백이 있는 묘소를 후손이 삼가 지키고 공경히 보존하지 않겠는가. 이제 六, 七대에 세상에 변천하여 도로가 침범할 위험이 있는 고로 장차 내세를 두려워하여 광중 남쪽을 열어 지석을 묻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우리집 세장 묘도 노산의 남쪽 을좌 一광은 선조 유택이라 지행 독경(志行篤敬)함이 암연(闇然)히 아롱져 문채가 나니 천억 후예는 길이 지켜 잊지 말지어다. 六世孫 炳寬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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